일기장/호구지책

워킹 데드

nsync620 2020. 9. 20.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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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3학년 때 국어 선생님이 생각난다. 

 

선생님께서는 늘 항상 다른 선생님들보다 빨리 출근하셔서 복도를 유유히 거니시곤 했다. 선생님은 당신께서 등교 시간보다 훨씬 빨리 학교에 와 텅 빈 교실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학생들을 가끔씩 보셨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런 학생들을 볼때면 "아무것도 안하고 멍때리고 있는 것 만큼 한심한 것은 없다."라고 생각하시며 우리에게 늘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라고 말씀하셨다. 

 

백화점에서 보안팀 소속으로 일을 한 적이 있다. 내가 하는 일은 고객에게 필요한 정보와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동시에 건물 내외부의 시설물 관리와 안전을 책임지는 업무가 주 소관이었다.

 

올 블랙 정장에, 삐까뻔쩍 광이 난 구두에, 한 껏 힘준 머리에. . .

겉으로 보면 꽤나 그럴싸해 보이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하면서 가장 많이 든 생각은

'나는 산송장 이다.' 라는 것이다.

 

'백화점을 방문한 사람들은 물건을 사러 온 목적이라도 있지, 직원들은 그들에게 물품을 팔고 있기라도 하지, 시설관리원들은 정비라도 하고있지, 그런데 나는 인산인해로 북적한 그 한 가운데 멀뚱히 서서 아무것도 안하고 있지 않느냐? 허송세월도 이런 허송세월이 없다.' 라는 생각이 들어 나 스스로 정말 비참하게 느껴졌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일하면서 든 생각은 이러했다. 

 

나는 그런 초점잃은 잉여인간이 되기 싫었다.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 곳에 있으면서 과연 내가 뭘 하면 그런 잉여인간이 되지 않을 수가 있을지를 골똘히 생각해보았었다.  

 

내가 일했던 곳은 상권 특성상 백화점을 방문하는 고객들 중에 외국인들이 꽤 많아서 일하면서 심심찮게 그들을 볼 수 있었다. 

 

평소 외국어 회화능력을 키워보고 싶었던 개인적인 소망이 있었는데, '그들을 바로 옆에서 마주보며 그들에게 외국어로 정보를 제공해줄 수가 있다면 돈도 벌고 회화능력도 쌓을 수가 있는 일석이조의 기회가 바야흐로 내 앞에 당도한게 아닌가?' 라는 생각에 외국인들을 발견할 때면 멀리 떨어져있는 거리라도 일부러 그들에게 다가가서 '나는 안내하는 직원이요' 하는 티를 냈었다. 층별안내도에 서서 안내책자를 펴고 무언가를 찾고 있는 그들을 발견할 때면 슬금슬금 그들에게 다가가 나에게 뭘 물어보질 않아도 먼저 그들에게 말을 붙이며 그들이 찾는 무언가를 알려주곤 했었다. 일하면서 그들이 나에게 뭘 물어볼수도 있을거라는 생각에 비록 원어민 수준의 능수능란한 회화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런 생각을 가지고난 이후로 하루하루가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그렇게 나는 일하는데 있어서 흥미를 하나 찾았었다. 

 

코로나 사태가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마스크까지 쓰고 홀로 덩그러니 서있는 백화점 보안직원을 보고서 든 생각을 한번 끄적여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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