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라~ 12년 지기 친구야 !
때는 바야흐로 2009년,
폼생폼사로 한껏 잔망스럽게 멋 부리며 활개를 치고 다녔던 그때 그 시절, 나는 이 친구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카시오 시계, 바로 이 녀석이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당시 '카시오'라는 브랜드 네임 벨류는 안타깝지만 친구들 사이에서 소위 말하는 저가의, 빈곤한 이미지가 강했던 탓에 시계를 차고 다니면서도 디버클(일명 똑딱이) 부분에 새겨진 카시오라는 브랜드 네임을 숨기느라 애쓰고 다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돈은 없고, 뽄은 지겨야 겠고......,
지금 생각해보면 참 같잖은 허세가 아닐 수가 없는데, 멋 부리고 싶어 했던 어린 시절에 정말이지 큰 맘먹고 구입한 시계여서,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내 인생 첫 시계였던 까닭에 참 애착이 많이 가는 친구였다. 오죽하면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까지도 늘 차고 다녔겠는가?
행여라도 흠집이 나진 않을까, 고장이 나진 않을까 하는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금이야 옥이야 항상 애지중지하며 나와 함께 해온 그런 친구였는데, 그런 시계였는데......,
이 녀석이 오늘부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제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새건전지로 갈아 끼워봐도, 용두를 이리저리 움직여봐도 이 녀석은 대답이 없다. 지난 세월 동안 온갖 희노애락을 같이 하며 동고동락 해왔던 녀석이기에 멈춰버린 친구를 보고 있자니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는 지난날 생각에 가슴 한편이 저며온다.
모니터 뚫어져라 쳐다보며 이것저것 재보다가, 그렇게 해서 골랐던 너였는데, 이제는 진짜 헤어질 시간인가 보다.
생일날 흙먼지 마셔가며 일했던 날에도, 지독한 현실에 몸서리 칠만큼 고달팠던 날에도, 주변의 나를 향한 온갖 비난과 멸시에 피눈물을 삼켰던 날에도,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날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필코 잘 살아보겠노라 절치부심했던 날에도 언제나 나와 함께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말라 전해주던, 다가올 희망찬 내일(來日)이라는 시간을 알려주던, 12년을 함께해온 나의 친구야~
잘 가라 !



박스까지 안 버리고 나뒀겠다, 시계 실물도 그대로 있겠다, 두고두고 간직해서 좀 더 시간이 흐르면 이 일기장과 같이 다시 꺼내 봐야겠다. 이게 낯간지러운 행동일런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흘러 내가 꿈꿔온 삶을 이룬 후에 악바리 같이 아등바등 매달리며 살아왔던 지난날을 잔잔히 음미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꽤 의미가 있을 것 같다.